블로그 이미지
그기 아이라 카드만 앱팀장

카테고리

.COM SENSE (139)
TEXT (30)
VIEW (23)
MOVIE (9)
LIFE (9)
SPORTS (5)
ISSUE (8)
SHORT (10)
WORDS (9)
DOCS (8)
KNOWLS (27)
Total
Today
Yesterday

'아방궁'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0.04.01 [단어의정리] 아방궁

[단어의정리] 아방궁

WORDS / 2010. 4. 1. 20:24


화려하고 분에 맞지 않은 건물을 이르러 "아방궁"이라 표현하곤 한다
사실 왜 아방궁인줄은 모르고 단어를 쓴다는 기분이 어쩐지 몹쓸짓이라고 생각이되어
구글신께 물어보니 아래와 같은 내용을 알고 있었다..

알고 씁시다

 

서안시 서쪽 교외에 있는 이 유적지는 동서 2,500m와 남북 1,000m의 크기로 앞의 전(殿)과 뒤의 궁(宮), 두 부분으로 나위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의 유적지는 동서 1,300m와 남북 500m의 60만 평방미터의 면적으로 1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의 건설은 한편으로는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알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정복하는 과정에서 경성(京城-북경), 함양(咸陽-서안)의 궁궐들을 다시 짓게 했는데 이것을 "육국궁전(六國宮殿)"이라 불렀다. 한번은 진시황이 각지의 12만 영주와 부상(富商)들을 함양으로 모았는데, 함양궁에 숲처럼 빽빽히 들어서서 입구까지 꽉 찼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남쪽으로는 위강(渭江), 북으로는 고원을 접하고 있어서 앞으로 넓힐 수가 없었다. 이에 진시황은 위강을 메워 남쪽의 평원까지 확장시켰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9년(서기 212년)에는 서주(西周)의 풍고근처에 아방궁의 전전(前殿)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방(阿房)'이라는 것은 '근방(近旁)', 즉 함양의 근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처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진시황이 죽고, 그 2세가 이어 공사를 계속하게 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방궁의 크고 작은 전우(殿宇)만 700여 곳에 이르고,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고 해도 각각의 방이 모두 기후가 틀렸다고 한다. 진시황 생전에는 주변의 육국(六國)에서 가져 온 보석과 미녀들을 궁내에 보관해 두었고 매일 돌아가며 하루씩 각각의 방에 머물렀는데, 죽을때까지도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진왕조의 정치제제와 경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농민봉기가 일어나 항우(項羽)가 병을 이끌고 함양을 함락시키면서 아방궁도 폐허로 남게 되었다.

 from http://www.chinatravel.co.kr/

 

《사기》에 의하면, 궁전 건축물의 규모는 동서로 5백보(3000척), 남북으로 50장(500척)라고 한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동서로 약 600~800m, 남북으로 113-150m에 이른다.

그 궁전 위에는 10,000명이 앉을 수 있으며, 전하에는 높이 5장의 기를 세울 수 있었다. 전 외에는 책목(柵木)을 세우고 복도를 만들어, 이곳으로 남산에 이를 수 있고 복도를 만들어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의 궁전에 연결되었다.

그 건축에 동원된 인력의 수는 70여 만에 달했다. 더욱 더 여러 궁을 만들어 관중에 300, 관외에 400여개, 함양 부근 100리 내에 세운 궁전은 270 여개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민가 30,000호를 여읍(驪邑)에, 50,000호를 운양(雲陽)에 각각 이주 하게 했다. 각 6국의 궁전을 모방하여 6국에서 데려온 비빈을 모두 이곳으로 배치하였고

from wikipeida

 

Posted by 앱팀장
, |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